월간산[477호] 20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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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산화첩] 사량도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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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병창 한 곡조, 해풍에 실려 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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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도(蛇梁島) 지리산(池里山)은 봄날 진달래 산행이 멋있다고 하지만, 신록의 여름산행 또한 큰 매력을 갖고 있다.
설악의 공룡능선을 축소해 놓은 듯한 옹골찬 암릉이 녹색의 울창한 숲과 동화되어 초록 바다에 산 그림자를 드리우면 아름다움이 한층 더해 기운이 생동하는 한 폭의 수묵산수화를 그려낸 듯하며, 땀 흘린 산행 후에는 대항해수욕장에서 해수욕을 즐길 수 있어 좋다. 또한 옥녀봉에 올라 윗섬과 아랫섬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초록 바다 동강(桐江)을 바라보노라면 선경에 든 듯해 탄성이 절로 터진다.
산행은 일반적으로 돈지 또는 내지를 기점으로 하여 지리산(398m), 불모산(399m)을 거쳐 옥녀봉(303m)에서 진촌으로 하산하는 종주코스를 택하지만 여름철에는 대부분 대항으로 내려선다. 능선은 암릉과 육산으로 형성되어 있어 조망과 땀을 식히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산행거리는 약 8km로 총 5시간 정도 소요된다.
- ▲ 슬픈 전설이 어린 옥녀봉과 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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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금 저리는 로프 타기 연속
오랜 세월 동안 풍우를 견딘 바위산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끼고 외줄 타기, 로프 사다리 타기를 하거나 수직에 가까운 철계단을 통과할 때는 오금이 저려 극기훈련장 같기도 하지만 산행의 재미는 내륙의 큰 산보다 더하다.
사량도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상도(윗섬), 하도(아랫섬), 수우도 3개의 유인도와 6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상도에는 암봉으로 이루어진 지리산과 불모산이 있으며, 하도에는 일곱 봉우리의 멋스러움을 자랑하는 칠현산이 있어 산꾼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른 아침 해무 사이로 비친 희미한 햇살은 한층 몽환적 분위기로 빠져들게 한다. 멀어지는 삼천포항을 뒤로 하고 작은 섬들을 돌아 사량도를 향해 떠나는 뱃머리에는 갈매기가 앞장을 선다.
내지항에 도착하니 나이 먹은 느티나무 고목이 해변가로 마중 나와 뭍에서 오는 손님을 반긴다. 반가움에 눈인사를 나누고 해안도로를 따라 걸었다. 수정같이 맑은 바닷물이 몽돌과 속삭이는 소리가 청량하게 들린다.
사찰 뒤로 난 등산로 입구에 도착하니 표시기가 셀 수도 없이 매달려 있다. 이 산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삼천포 유람선협회에서는 등산안내 간판도 세워 놓았다.
산길로 접어들었다. 엉겅퀴 보라색 꽃술은 햇살을 받아 더욱 선명하다. 바로 옆 묵밭의 칡은 재선충에 시달려 바싹 마른 소나무 가지까지 제멋대로 감고 기어오른다.
숲 속 너덜지대를 숨가쁘게 올라 조망 좋은 너럭바위에 섰다. 첫 봉우리인 276m봉이다. 노송 너머로 한려수도 푸른 바다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중첩한 다도해의 섬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강강수월래 춤을 추는 듯하며, 시원한 바닷바람은 신록의 싱그러움을 싣고 와 가슴속까지 초록으로 물들인다.
- ▲ 지리산(池里山) 정상에서 내려다본 돈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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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능선으로 올랐다. 이곳 바위능선의 대부분이 편마암이라 모서리가 칼날처럼 날카롭다. 한눈이라도 팔면 자칫 안전사고가 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시종일관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그러나 조망 좋은 너럭바위 암봉에 올라 일망무제의 다도해를 바라보면 위험하고 힘든 줄도 모르게 된다.
사량도 지리산은 숲길과 암릉길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양편으로 펼쳐지는 비경의 조망은 어느 산과도 비교가 안 된다. 숲 그늘에 앉아 땀방울을 식히노라면 상큼한 갯내음이 파도소리에 실려온다.
숨을 몰아쉬며 조금 오르자 돈지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마주친다. ‘돈지 1.66km, 내지 1.70km, 지리산 0.64km’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돈지와 내지 어느 코스를 택해도 지리산 정상으로 오르는 거리는 비슷하다. 유람선을 타고 들어오는 대부분의 등산객은 돈지에서 출발하고, 차량 운반이 가능한 철부선을 타고 오는 사람들은 내지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주민들은 ‘智異山’ 아닌 ‘池里山’으로 표기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산이란 뜻으로 ‘지리망산(智異望山)’이라 불리기도 하는 사량도 지리산은 사량면의 여러 섬 중 가장 큰 섬인 윗섬을 동서로 가로지른 산줄기에 솟았다. 서쪽에 있는 돈지(敦池)마을과 동쪽 내지(內池)마을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하여 두 마을의 공통지명인 지리(池里)를 산이름으로 삼아 지리산(池里山)이라고도 한다.
현지인들은 지리망산으로 부르지 않고 지리산으로 부른다. 이정표나 정상 표지석에도 지리산으로 표기를 해 놓았다. 1m 더 높은 불모산이 사량도에서는 제일 높은 정상이지만 지리산의 유명세에 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지리산 500m 지점에 위험구간 우회로 표시가 있다. 위험로는 암봉구간이고 우회로는 숲길이다. 여름산행은 숲길을 택하는 것도 좋을 듯하여 우회도로로 나아갔다. 우회로와 위험구간은 곳곳마다 표시가 되어 있다.
지리산 정상 바로 아래 조형물 같은 암봉이 우뚝 솟아 있다. 앞서 가던 방배산악회 이지은씨는 “어머, 마치 조각 작품 같애”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는 때때로 사물을 현실에서 벗어난 시각으로 보려 한다. 그림을 사물과 비슷하게 그리면 ‘꼭 사진 같다’고 하며, 물안개 끼는 아침 호숫가의 사진 한 장을 보면 ‘마치 그림 같다’고 말한다. 이러한 습성이 예술의 창작력을 불러일으키는지도 모른다.
상념에 빠져 걷다 보니 어느새 지리산 정상에 올랐다. 나는 맨 먼저 우리의 모산(母山)인 지리산(智異山) 쪽을 바라보았다. 멀리 희미하게 지리산 정상이 보인다. 행운이다. 지리산의 영험한 정기가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슬며시 스케치북을 꺼내 지리산을 바라보며 소망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스케치했다. 뒤돌아본 돈지항의 아름다움도 담았다. 여객선이 뱃고동을 울리며 쪽빛 바다에 하얀 선을 긋듯 유유히 돈지항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 ▲ 지리망산(智異望山)에서 지리산(智異山)을 바라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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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정상에서 700m를 내려섰다. 땡볕에 달구어진 암릉길은 옷깃을 땀방울로 적시게 했다. 아직도 옥녀봉까지는 3km가 남았다. 옥녀봉을 바라봤다. 풍만한 여인네의 젖꼭지처럼 오똑 솟아 더욱 아름답다.
암릉과 숲길을 번갈아 오르내리며 가다 보니 약간 넓은 안부에 서울의 관악산이나 청계산에서 보았던 간이 탁주판매소가 있다. 이정표에는 ‘내지 1.30km, 지리산 1.16km, 옥동1.70km’로 표시되어 있다.
막걸리 한잔으로 갈증을 달래고 다시 걷는데 이번에는 위험구간을 아예 줄로 막아 놓았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우회로를 따라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인 메주봉으로 올랐다. 이곳에 올라 뒤돌아 바라보니 불모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막아 놓은 것이다.
약간은 아쉬운 마음에 이번에는 일부러 위험구간을 택해 올랐다. 길고 커다란 두 가닥의 동아줄에 사람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가파른 암릉을 오르는 사람들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마치 동아줄을 붙잡고 천국문을 향해 오르는 사람들 같다.
거대한 절벽 아래는 나무 지팡이가 수북이 쌓였다. 조금 전까지 지친 몸을 의지하며 짚고 오던 지팡이를 절벽 오르기가 거추장스러워 이곳에 모두 팽개쳐 버린 것이다. 비싼 티타늄 스틱은 하나도 없다. 사람들은 쉽게 얻은 것은 쉽게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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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바다 위에 설악산 용아릉 옮겨 놓은 듯
밧줄을 붙잡고 힘들게 가마봉(305m)에 올랐다. 옆에는 등산객들이 쌓은 돌탑이 우뚝하다. 옥녀봉이 많이 가까워졌다.
훌쩍 건너뛰면 옥녀봉에 오를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옥녀봉의 위용은 힘찬 발묵산수화를 보는 듯하며, 윗섬과 아랫섬 사이를 흐르는 동강에 신록의 칠현산이 산 그림자를 드리우니 물기 넘치는 수채화 한 폭을 보는 듯하다. 동강의 초록 바다가 어찌나 맑고 짙은지 하얀 화선지를 바닷물에 담갔다가 건지면 초록 물감이 줄줄 흐를 것만 같다.
- ▲ 연지봉을 오르며 바라본 가마봉 천국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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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은 윗섬과 아랫섬 사이의 작은 바닷길이 마치 강물 같다 하여 동강이라 하였다. 이곳에는 영월의 동강처럼 동강나루터도 있었다고 한다.
가마봉 급경사 철다리를 내려와 좁은 관문을 통과해 너럭바위 암반에 올라서니 이곳이 연지봉 탄금대다. 아랫섬 칠현봉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하고 동강에는 꽃잎처럼 배가 떠 있다.
사람들은 이곳에 주저앉아 “와, 정말로 호수 같네!”하며 동강을 하염없이 내려다본다. 언젠가 태백에서 서울 구경을 온 아이가 한강을 건너다 말고 “와아, 바다다!”라고 탄성을 치니 옆에 있던 고모가 “바다가 아니고 한강이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른에게는 바다가 강처럼 보이고 아이에게는 강물이 바다처럼 느껴지나 보다.
- ▲ 사량도의 최고봉인 불모산의 암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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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아껴두었던 술 한 병을 꺼내 한 잔 마시고 나니 어디선가 가야금 병창 한 곡조가 해풍에 실려 오는 듯, 취화선(醉畵仙)이 된다. 이렇게 수려한 풍광과 설악 용아장성을 옮겨 놓은 듯한 절경이 바다 위에 떠 함께 어우러지니 산해불이천지(山海不二天地)가 여기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뒤로는 지리망산과 불모산이 연봉으로 이어지고, 가마봉 철계단은 천국문으로 오르는 계단처럼 보이니 옥녀봉이 더욱 우뚝하게 느껴졌다. 이 모든 아름다움을 좋은 사람에게 선물하려고 초록 바다를 보자기 삼아 사량도를 통째로 감쌌다.
탄금대에서 내려서는 로프로 엮은 나무 사다리는 공포의 극치다. 사다리를 내려섰다가 다시 가파른 암벽을 외줄 로프를 붙잡고 오르니 슬픈 전설을 간직한 옥녀봉 정상이다. 돌무덤이 있는 곳이 정상이라고 별도 화살표를 하여 놓았지만 일반인들은 별 관심이 없다.
뱀을 닮았다는 사량도 지리산의 연봉들은 실록을 뚫고 줄지어 솟아올라 마치 거대한 공룡의 잔등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 공룡의 잔등에 올라타고 한려수도 초록 바다를 갈매기 벗삼아 한가롭게 유람을 했다.
/ 그림·글 곽원주
원문출처 : 월간산 http://san.chosun.com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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