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명산을 가다
사량도 지리산
돈지마을~지리산~불모산~가마봉~옥녀봉~금평항
한바탕 해무 속에 산은 피고 지고
글 김민수 기자 \ 사진 양계탁 기자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 탓에 서울을 빠져나오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차창을 때리는 요란스런 빗방울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린다고 느껴질 즈음 얼핏 잠에 빠졌나보다. 줄곧 고속도로를 내달리던 버스가 국도에 접어들었는지 이리저리 출렁이기 시작했다. 부스스한 눈을 뜨니 버스는 잿빛 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낯선 바닷가를 내달리고 있었다. 서울을 출발한지 네 시간여, 버스는 통영시외버스터미널에 사람들을 내려놓았다. 먼저 내려온 일행과 만나 선착장으로 향했다. 흩뿌리는 비 탓인지 승선을 기다리는 이들은 많지 않았고, 섬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배편인 탓에 외지인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닻을 올린 배는 길게 고동소리를 울리는가 싶더니 이내 수면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창밖 풍경을 감상하길 수십 여분.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을 듣고 갑판에 올라가 정면을 뚫어지듯 응시했다. 하지만 짙게 낀 해무로 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한 줄기 해가 비치는가 싶더니 거짓말처럼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로 커다란 섬 하나가 두둥실 떠올랐다. 사량도. 녹색 신록으로 뒤덮인 산자락을 부챗살 마냥 늘어뜨린 옹골진 산 하나가 시선을 뗄 수 없게 한다. 사량도 한가운데 동서로 길게 드러누운 형상의 이 산은 외지인들이 사량도를 찾는 가장 큰 이유다. 바다와 산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뻔한 이유는 잠시 제쳐두더라도 산이 펼쳐 보이는 산세가 육지의 어느 명산 못지않게 수려하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마을을 부드럽게 끌어안은 산자락은 산정에 이르면 우람한 바위로 바뀌어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6.5km의 주능선은 아찔한 암릉과 호젓한 숲길이 적절히 섞여 있어 산행의 재미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량도 지리산 산행의 백미는 불모산(399m)을 내려와 향봉을 오르며 시작되는 옥녀봉까지의 구간이다. 이곳은 깎아지른 바위절벽을 한 가닥 로프에 의지해 오르내려야 하는 곳으로 흡사 유격훈련장을 방불케 한다. 하지만 봉우리 정점에 서서 바라본 주변풍광은 신천지 그 자체다. 험준한 바위벼랑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해송과 옥빛 바다에 길게 흰 꼬리를 늘어뜨리며 떠가는 크고 작은 선박들, 구불구불 기어가는 한 마리 뱀을 연상케 하는 주능선을 바라보노라면 감탄사가 절로 난다.
가마봉에서 옥녀봉으로 이어진 능선은 지리산 산행의 백미다.
종주 후 배편 이용 용이한 돈지마을이 들머리 사량도 지리산을 오르는 들머리는 크게 네 곳으로 나뉜다. 동서남북으로 돈지, 진촌, 옥동, 내지마을이 그것인데 지리산 주능선 전체를 걷기 위해서는 돈지나 진촌마을을 택해야 한다. 취재팀은 산행 들머리로 돈지마을을 택했다. 산행이 끝난 후, 여객선터미널이 위치한 진촌으로 내려서는 게 육지로 나가는 배 이용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50여 채 남짓한 가구가 모여살고 있는 돈지는 전형적인 포구마을. 뒤로는 줄줄이 늘어선 우람한 바위들이 시선을 사로잡는 지리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자그마한 개천은 산에서 뻗어 내린 작은 계곡을 마을로 유도해 생활용수로 사용할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물길을 낸 것이다. 하지만 수량은 많지 않다. 여타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비가 오면 물이 바다로 빠져버리는 탓이다. 사량도를 여행하다 보면 ‘절수’라고 쓰여 있는 작은 아크릴판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당 지자체인 통영시에서 오는 2010년 12월 완공목표로 이곳 사량도에 진주 남강 물을 공급하는 상수도 공사를 진행 중이라 하니 하루 빨리 주민들의 불편이 해소되길 바랄뿐이다. 개천을 따라 난 좁은 골목길을 따르다 보면 사량초교돈지분교에 다다른다. 등산로는 학교 왼쪽으로 열려있다. 돈지마을을 출발해 지리산까지의 거리는 2.1km, 한 시간 정도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등산로 좌우로는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고, 버려진 집터 주위로는 낮은 돌담이 둘러쳐져 있다. 잠자리 떼가 낮게 날고 있는 완만한 산길은 육지의 시골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적한 산길을 휘적휘적 걷는다. 본격적인 오름길은 멀리 해안가에서 바라보이던 지리산 비윗살이 사뭇 가까워졌다 느낄 즈음 시작된다. 초입의 된비알은 20분 남짓 이어지며 쉽지 않은 산행을 예고한다. 가빠오는 숨을 가다듬으며 높이를 더해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전망바위 하나와 만나게 된다. 이곳에 올라서면 우람한 바위근육을 숨김없이 드러낸 지리산 정상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북한산 인수봉 대슬랩을 연상케 하는 진갈색 바위 사면은 암벽등반 경험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눈독을 들일만큼 멋스럽기만 하다.
옥녀봉 우회로
주능선에 올라서면 남해바다가 시야 한가득 정상에서 동쪽으로 분기한 능선의 안부까지는 지척이다. 능선에 올라서니 비릿한 바다 냄새가 실린 해풍이 땀에 젖은 몸을 식혀주어 고맙기 그지없다. 쪽빛 바다 위에 점점이 솟아오른 크고 작은 섬들이 시야에 들어오면 산행의 재미는 배가된다. 정상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등산로 오른쪽 가장자리는 단애를 이루고 있다. 아래로는 반구모양의 돈지마을이 아찔하게 내려다보인다. 그 너머 바다 한가운데에는 사량도의 부속섬인 수우도가 자리하고 있고, 파도가 하얀 포말이 되어 부서지는 갯바위 위에서는 강태공들의 낚시가 한창이다. 수우도 왼쪽 옆, 왕관 모양의 작은 섬은 죽도라고도 불리는 대섬으로 이순신 장군이 대나무 화살을 얻은 곳이라는 얘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이곳을 다녀간 이들이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다른 곳에서는 쉽게 만나볼 수 없는 특이한 모양의 바위다. 이곳의 바위들은 흡사 책장에 꽂힌 책을 연상케 하는 데 그 모서리가 무척이나 날카롭다. 칼날 같은 바위를 이리저리 딛다 보면 등산화 밑창이 견뎌낼 지 의심스러울 정도. 자칫 넘어지기라도 하면 부상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므로 항상 발 디딤에 유의해야 한다. 등산로는 큰 오르내리막이 없는 평탄한 능선으로 이어진다. 이윽고 올라선 작은 봉우리 한편에는 오가는 이들이 쌓아올린 커다란 케른 하나가 말없이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양옆으로 펼쳐진 끝 간 데 없는 바다와 다도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점점이 박힌 섬들을 구경하며 걷길 1시간 정도. 지리산 정상에 올라섰다. 전체적으로 펑퍼짐한 정상부는 온통 바위로 이뤄져 있다. 잡목이 거의 없는 이곳은 막힘없는 조망을 자랑한다. 하지만 얌전하나 싶던 장마철 하늘이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 한줄기 바람이 불어오나 싶더니 산의 남사면을 타고 올라온 해무가 시야를 가려버린 것. 허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쩌랴. 대자연의 변화무쌍한 모습 앞에서 미약한 인간은 그저 순응할 뿐이다.
만용은 금물, 초심자는 우회로 이용이 상책 정상에서 능선으로 내려서는 길은 바위사면을 이루고 있다. 예의 날카로운 바위들이 줄줄이 늘어선 이곳은 눈이나 비가 내린 직후라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윽고 시작되는 숲길을 따라 20분쯤 내려오면 이정표가 마련되어 있는 작은 사거리 안부에 닿는다. 여기서 우측은 사량도 윗섬에 하나뿐인 사찰인 성자암을 경유해 옥동마을로 내려서는 길이고, 좌측은 내지마을로 이어지는 길이다. 성자암은 산행 도중 유일하게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지만 주능선에서 한참을 내려가야 하는 곳이기에 식수는 산행 시작 전에 보충하는 게 좋다. 완만한 숲길을 얼마간 오르내리다 보면 달바위매점 터와 만난다. 등산객들이 몰리는 철이면 인근 마을 주민들이 물과 음료수를 내다파는 곳이다. 곧이어 불모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칼날능선이 시작된다. 이곳은 산 좀 다닌 이들조차도 아래를 내려다보면 오금이 저리는 곳으로 주의가 필요하다. 스탠스가 좁은 암릉 양옆이 가파른 단애를 이루고 있어 자칫 발을 헛딛기라도 하면 영락없이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초심자나 노약자는 왼쪽으로 나 있는 우회로를 이용하는 게 상책이다. 가파른 바위에 올라서면 얼마간 완만한 경사가 이어진다. 도중에 약 50cm 정도 너비로 능선이 끊어져 있는데 아래 빈 공간을 굵은 나뭇가지로 가득 채워놓았다. 손발 디딜 곳이 양호해 큰 어려움은 없지만 내려다보이는 절벽은 아찔하기만 하다. 주의해야 할 점은 바위 모서리를 홀드로 사용할 때에는 흔들림이 없는지 꼭 사전에 체크해야 한다는 것. 이 구간 곳곳에는 얼핏 보기에는 단단히 박힌 것 같지만 힘을 주어 흔들어 보면 의외로 쑥 뽑혀 올라오는 위태로운 돌들이 즐비하다. 이 구간을 통과해 칼날 같은 암능을 지나면 달바위라고도 불리는 불모산 정상에 닿는다. 사량도 지리산의 최고봉인 이곳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주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특히 가야할 방향으로 펼쳐진 산세가 압권인데 가마봉에서 시작해 마지막 봉우리 옥녀봉을 향해 달려 나가는 능선은 척추동물의 등뼈를 연상케 한다. 멀리 왼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대항해수욕장에서는 무더위를 식히는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날카로운 암릉구간을 지나 가마봉으로 향하고 있다.
가마봉에서 옥녀봉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백미 불모산을 내려서는 암릉 곳곳에는 다리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전망 포인트가 즐비하다. 걷히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만 가는 해무는 험한 산세와 어울려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고산준봉에서나 볼법한 파노라마의 연속. 사량도 지리산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되며 카메라를 쥔 손은 쉴 새가 없다. 얼마간 완만한 숲길을 따르던 등산로는 바윗길로 바뀌며 솟아오른다. 잡목지대를 헤치며 나아가다 가마봉(303m) 오름길이 시작된다. 가파른 바위사면에 어린아이 속목 굵기 만한 굵은 로프 두 가닥이 늘어뜨려져 있는 구간. 30m 정도를 밧줄에 의지해 올라야 하지만 약간의 주의만 기울인다면 크게 어렵지 않다. 문제는 깎아지른 가마봉 후면에 설치된 철제계단이다. 수십 미터 높이에 경사가 80도에 가까운 이곳은 한해에 꼭 몇 차례씩 안전사고가 발생하는 곳이다. 따라서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물론이고, 사람이 몰리는 철에는 앞뒤 간격을 충분히 두고 오르내려야 한다. 가마봉을 내려서면 작은 암봉 하나가 등산로를 가로막고 있다. 오르기는 그리 어렵지 않으나 내려서는 구간은 10m 남짓한 바위를 밧줄에 의지해 하강해야 한다. 산행초심자는 애초에 우회로를 이용하는 게 좋다. 이곳을 내려서면 이번에는 연지봉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향봉이 기다리고 있다. 수직에 가까운 바위를 밧줄을 잡고 올라야 하는데 왼쪽으로 깊은 절벽이 도사리고 있다. 앞서 가마봉 계단길과 더불어 안전사고의 위험이 높은 곳으로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만약 여의치 않을 경우 봉우리 우측을 끼고 우회로가 마련되어 있으므로 미련 없이 돌아서는 게 좋다. 너럭바위로 이뤄진 향봉 정상은 여러 명이 쉬어가기에도 충분할 정도로 널찍하다. 향봉 내려서는 길, 직벽에 걸쳐진 사다리 구간을 제외하면 위험한 구간은 거의 통과한 셈이므로 한숨 돌려가기로 한다. 이곳에 서면 좁은 해협 건너 하도에 솟은 칠현산을 배경으로 옥녀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바라보인다. 가파른 단애를 이루고 있는 봉우리 곳곳에는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는 해송들이 각기 자태를 뽐내고 있다. 옥녀봉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로프를 붙잡고 씨름을 벌여야 한다. 하지만 앞선 향봉에 비한다면 그리 위험하지는 않다. 바위 왼쪽으로는 우회로도 마련되어 있다. 정상에는 오가는 이들이 쌓아올린 돌무덤이 있고, 멀리 아래로 산행날머리인 금평마을이 바라보이기 시작한다. 시야를 돌려 불모산 정상에서 옥녀봉까지 걸어온 바위능선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돌렸다. 옥녀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철제계단으로 되어 있다. 이곳을 내려와 얼마간 진행하면 갈림길 하나와 만난다. 여기서 직진하면 금평항, 좌측으로 접어들면 대항해수욕장 방면으로 가는 길이다. 얼마간 이어지던 바윗길이 잦아들고 곧이어 편안한 숲길이 시작된다. 산 아래 위치한 사량초등학교에서는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기분 좋은 음악소리처럼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한다. 평지를 만나면 매년 3월이면 노란 꽃망울을 틔우는 유채꽃 군락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이정목이 되어주는 일주도로를 만나며 산행은 끝이 난다. 옥녀봉 정상에서 이곳 날머리까지 30분 안팎이면 닿을 수 있다. 문득 새천년이 시작되던 지난 2000년 초, 지인과 함께 했던 이곳 지리산 산행이 떠오른다. 당시만 해도 섬으로 향하는 배가 긴 고동소리와 함께 육지를 출발하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돌고래 무리가 그 뒤를 따르며 인사를 건넸다. 또한 지리산은 물론이고 섬 곳곳이 쓰레기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함을 자랑했다. 하지만 수년 뒤 다시 찾은 산은 이전과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관광버스 단위로 몰려든 등산객들 탓에 산의 후미진 곳은 쓰레기 천지였고, 이는 해안가를 따라 나있는 도로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량도 주민들의 자체적 노력으로 많이 개선되었다지만 그들만으로 이곳을 지키기에는 분명 역부족이다. 통계에 따르면 연간 20만 명, 주말이면 수천 명의 등산객들이 이 산을 찾는다고 한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고 또 좋은 추억거리를 간직한 채 돌아올 수 있는 곳으로 오래토록 남기를 바랄뿐이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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