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나의 고향은 풍경이 아름다운 사량도 섬이다.
섬 지역이지만 그 시절만 해도 전교생이 몇 백 명이나 될 만큼 상당수의 학생들이 초등학교를 다녔다. 내가 살던 동네는 덕동이다. 덕동에서 읍덕초등학교로 처음 배정 받아 다닌 덕동 1기인셈이다. 그 시절 살기는 어려웠어도 지금의 아이들이 전혀 느낄 수 없는 정겨움과 그리움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다.
덕동에서 읍덕초등학교로 가는 길은 세 가지 길이 있었다.
산길, 바닷길, 중간길인 대로가 등하교 길로 이용되었다.
봄이면 산길로 다니면서 삐삐도 뽑아 씹고, 준밥(춘란의 꽃)과 진달래꽃도 따다 먹고, 가을철엔 이산 저 산 풍성하게 열려 있는 밤나무, 감나무, 개암나무, 어름나무, 다래, 볼똥 열매들은 그때 그 시절 우리들의 최고의 간식 꺼리였다.
여름철엔 바닷길로 다니면서 게나 고동도 잡고 수영도 하면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바닷가에서 뛰어 놀았던 추억도 아른거린다.
겨울철엔 점심시간을 이용해 산길 먼당 잔디밭에 썰매를 숨겨놓고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뛰어 올라와 신나게 놀았던 썰매타기도.....
집으로 돌아오는 하교 길에 가을날 고구마를 수확하고 다 줍지 못한 짜투리 고구마가 묻혀 있을 고구마 빈 밭을 발로 슬슬 밀고 다니면서 어쩌다 나온 고구마를 주워서 친구들과 엄청 맛있게 먹으며 걸어왔던 기억도!
지금 내 나이 마흔 중반 고개에서 돌이켜보니, 너무나도 그립고 그리운 추억이 되어 웃음 짓게 한다.
지금 읍덕초등학교 운동장은 지난날 우리들의 작은 손등에 새겨진 도장 덕분이리라.
그때까지 만해도 학교가 아직 미완성이고 운동장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우리들은 매일같이 세숫대야, 괭이, 삽 등을 들고 다녀야만했다. 학생들이 운동장을 괭이로 파고 흙도 나르고 하면서 선생님이 할당해준 숫자만큼 채우고 나면 선생님께 손등에 도장을 받고 하교를 해야만 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도 우리 학교 운동장을 확장하는데 함께 동원이 되어주셨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은 강영덕, 윤종웅, 이돈, 강춘호 선생님외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윤종웅 선생님은 풍금을 아주 잘 치셨던 걸로 기억이 난다.
눈을 지그시 감고 치시던 그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였는데 아침 조례 시간에도 풍금을 들고 나와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를 선생님의 풍금소리에 맞혀 부르곤했다.
겨울철 교실 난로 피울 장작을 당번을 정해 몇 개씩 묶어 가지고 다녔던 시절!
급식으로 넓적한 사각 건빵을 교육청 배가 섬 지역을 순회하면서 선창에 풀어주면 당번이 그것을 받으러 가야되는데 서로들 가져오려고 야단들이였다.
왜냐하면, 급식을 받아오면 깨지지 않은 건빵 한 봉지와 급우들에게 나누어주고 남은 부스러기 건빵도 더 가지고 갈 수 있었기에 경쟁이 치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아이들은 이와 같은 나의 어린시절의 추억을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량초등학교 70년사에 즈음하여 돌이켜 본 나의 그때 그 시절에 다녔던 나의 초등학교 시절의 회상이다.
지금의 지역여건과 현실속에서 나의 모교가 비록 분교로 되었지만 언제까지 존립을 할 수 있을지 자못 우려되는 마음은 있으나 사량초등학교의 영원한 번영과 명예를 위해 힘찬 화이팅을 외쳐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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